정신 없는 통에 블로그를 본의 아니게 방치해 두었다. 바쁜 것보단 게으른 탓이 더 크겠지만. 사실 그동안 쓰잘데 없는 타이쿤류 모바일 게임이나 하면서 놀았습니다.

각설하고. 지금 뮈라이 작품 녹음을 들으면서 이 포스트를 쓰고 있음. 방송 녹음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도움이 되는 날이 오긴 오는가보다.

죄르지 리게티: 선율들
파람 비르: 하야그리바
조현화: 마법사의 제자
트리스탕 뮈라이: 모래언덕의 정령
올리비에 메시앙: 천상의 도시의 색채

프랑수아-프레데릭 기, 피아노 (5)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 티에리 피셔

2013년 10월 9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리게티의 Melodien은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 중 하나다. 60년대 초의 Atmosphères의 우중충한 잿빛 사운드에서 점차 벗어나서 리게티의 음악은 조금씩 더 다채로운 빛깔을 띠게 됐다. 이전의 그 빽빽한 숲 같은 미크로폴리포니가 여기서는 조금 듬성듬성하게 풀려서 악기가 그리는 선율들이 조금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각 성부는 더 이상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뭉쳐지지 않고 흩어지거나 포개어지기만 할 뿐이다. 실연으로 이 곡을 들으니까 그 섬세하게 얽혀 있는 느낌이 제대로 살아있었다. 다만 연주의 수준은 살짝 아쉬웠다. 어제 전체 연주를 들으면서 딱 한 번 이 생각을 했다.

그 다음으로 연주된 작품은 처음 듣는 작곡가가 쓴 것이어서 약간 더 긴장을 하고 들었다. 연주회 전 진은숙 선생이 각 섹션의 색감을 이야기도 해주었는데; 내게는 별로 와닿지는 않았음. 현대음악의 경우에는 작곡가의 어법에 익숙해진 뒤에야 알 수 있는 부분도 있으므로 섣불리 뭐라고 하지는 않겠다. 작품을 들으면서 바로 전 리게티의 영향도 받았고, 버트위슬 생각도 났다. 기회가 된다면 더 들어보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음.

아르스 노바의 실내악 연주회에는 꼭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하나씩 들어가는데, 다음 '마법사의 제자'는 작곡가 조현화가 직접 자기 작품을 설명하러 나왔다. 그는 작곡 기법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들으면 음악이 알아서 설명해줄 거라고 했고, 그 말 그대로였다. 작품의 질감이 전체적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가볍고, 반복되는 짧은 리듬 등으로 접근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미지도 꽤나 명확하게 전달되었고. 나는 그 폴 뒤카의 작품을 들어본 적은 없고 리게티의 피아노 연습곡 중 동일 제목의 작품은 알고 있는데, 두 작품 간에도 유사성이 어느 정도 느껴져서 재미있더라. 작품의 발상 자체는 작년 신동훈의 작품이 더 신선하다고 생각하지만.

2부는 프랑스 작곡가들의 두 작품이 연주가 되었다. 뮈라이의 작품은 단순히 스펙트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화성과 배음과 음색의 탐구에만 그치지 않고 풍부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인상주의 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묘사적인 제목을 쓰고 있지만 작품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오히려 건조함이 아닌 활발함이었다. 라이브 전자음이 아닌 샘플러를 쓰는 곡이라고 들었는데 효과가 아주 생생했다. 이래서 실연을 많이 들으러 가야 하는 듯.

마지막 메시앙의 Couleurs de la cité céleste가 진정한 하이라이트였다. 한 마디로 압도적이었다. 공기가 달라진다는 게 이런 거라고 느낄만큼. 관악의 유니슨이 제대로 꽂힐 때는 머리가 곤두서는 것처럼 짜릿하더라. 음 피아노 아저씨가 페달을 조금만 덜 썼으면 했을 때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바라는 건 너무 배가 부른 것이겠고. 메시앙 고유의 '색채'를 띤 화음, 금관의 묵직한 음색과 끝없이 뻗어 마치 정지된 듯한 리듬까지 정말 환상적으로 아름다웠음.

이제껏 아르스 노바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다녔던 것은 아니라고 해도, 나름대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찾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항상 만족했던 것은 아닌데 이번에는 이제껏 했던 것보다 조금 더 발전한 것 같다. 연주의 집중력도 더 좋아졌고 현대음악으로도 청중과의 교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보여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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